경기 침체에도 경차 판매 급감, 7만 대 붕괴 위기
소비자 수요는 대형·고급차에 집중, 경차 외면 가속
캐스퍼·레이EV 등 신차 효과도 한계, 구조적 침체 현실화

‘불황일수록 경차가 잘 팔린다’는 자동차 시장의 오랜 공식이 올해는 완전히 깨지고 있다. 국내 경차 시장이 전례 없는 급감세를 보이며 연간 판매량 7만 대선 붕괴가 유력해졌다. 소비자들의 대형차 선호와 신차 부재, 제조사들의 전략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경차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5월 국내 경차 신규 등록 대수는 5,626대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37.4% 급감했다. 1~5월 누적 등록 대수 역시 3만809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4만6,517대) 대비 33.8% 줄었다. 이 추세대로라면 올해 경차 판매는 7만 대를 밑돌 것으로 보인다. 이는 15년 전인 2009년과 비교해 약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캐스퍼·레이EV로 반짝했지만…반등엔 한계

국내 경차 시장은 2012년 21만6,221대로 정점을 찍은 후 꾸준한 하락세를 이어왔다. 2021년에는 9만8,781대로 10만 대를 밑돌았지만, 같은 해 9월 출시된 현대차의 경형 SUV ‘캐스퍼’가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후 2022년에는 연간 13만4,294대가 판매되며 일시적 반등에 성공했다.
2023년에는 기아가 35.2kWh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탑재한 ‘레이EV’를 출시하면서 친환경 경차 수요를 겨냥했으나, 전반적인 흐름을 반전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올해는 캐스퍼EV가 소형차로 분류돼 경차 판매량에 포함되지 않으며, 유일한 신규 모델도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현재 국내 경차 라인업은 기아 모닝, 레이, 레이EV, 현대 캐스퍼 등 네 차종에 불과하며, 이들 대부분은 부분변경 수준에 머물러 제품 주기 측면에서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소비자는 대형차로, 제조사는 고수익 모델로

자동차 업계는 경차 판매 부진의 주요 원인으로 소비자 취향의 변화와 제조사의 전략 변화를 동시에 지목한다. 레저용 차량(RV)과 대형 SUV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작은 차체의 경차는 점점 외면당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최근에는 ‘영끌’로 차량을 구매하는 소비자들까지도 더 크고 고급스러운 차량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가성비를 중시하던 경차 수요층조차 중형 이상 차량으로 눈을 돌리고 있으며, 이는 차량 리스·렌트, 장기할부 등의 금융 상품 확산도 한몫하고 있다.
제조사 측에서도 수익성이 낮은 경차보다는 높은 마진을 기대할 수 있는 중대형차 중심의 제품 전략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쉐보레는 2022년 ‘스파크’를 단종시키며 경차 시장에서 철수했고, 이후 후속 모델은 나오지 않았다.
경차 시장, 구조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은 경차 시장의 침체가 단기적인 흐름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소득 양극화, 교통 인프라 변화, 전기차 전환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경차의 경쟁력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기차 시대에 접어들며, 소형 EV의 가격 경쟁력마저 중형 EV에 밀리는 현상도 경차 수요 감소의 또 다른 요인이다. 예컨대 보조금을 포함하면 중형급 EV와 경형 EV의 실구매가 격차가 크지 않아, 구매자 입장에서 경차의 매력이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 반등을 위해선 독보적인 디자인과 상품성, 가격 경쟁력을 갖춘 신차 출시가 필수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완성차업체들이 경차 개발에 소극적인 만큼, 당분간은 반등의 계기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경차는 한때 도심 주행과 경제성의 아이콘으로 사랑받았지만, 이제는 대세에서 밀려난 ‘과거의 유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업계와 소비자 모두의 시선이 대형차와 프리미엄으로 쏠린 지금, 경차 시장의 미래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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